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가람은 ‘실감실정(實感實情)’의 시화(詩化)를 강조하면서 옛 시조에 만연한 상투적 정서 표현을 지양하고 현실의 경험과 정감의 도입, 적절한 표현 방식의 개발을 강조했다. 그 구체적인 방편은 취재 범위의 확장, 격조의 변화, 연작 쓰기 등(<시조는 혁신하자>, 1932)으로 나타난다. 최남선이 정형시를 강조했다면, 가람은 특정한 형식에 구애되지 않는 시조 창작을 통해 근대적 서정시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시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여겼던 것은 ‘노래’가 아닌 ‘문학’으로서의 성격이었다. 가람은 시조에서 ‘창(唱)’과 ‘작(作)’을 구별했다. 고시조가 노래[唱]의 리듬에 의해 지배된 형식이었다면 근대 시조는 리듬에 선행하는 언어의 표현, 작자에 의해 선택된 시어[作] 등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엄격한 정형 율격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담은 문학의 한 형식으로 시조를 위치시키고자 했다. ‘정형시적 가치를 무시한’ 소산이라며 연시조(聯詩調)를 비판하던 논자들과 달리 그것을 옹호할 수 있었던 이유도 감정의 의미에 따라 리듬의 외적 형식은 변형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민족주의적 동일성 담론으로부터 벗어나 시조를 현대적 양식으로 복권시키려는 이병기의 기획은, 황종연에 의해 ‘탈조선주의’라 명명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람의 시조론은 시조 시인으로서의 성과작 ≪가람 시조집≫에 상당 부분 투영되어 있다. 동양적인 자연 사상을 바탕으로 한 오도(悟道)와 관조의 세계, 섬세한 언어 감각에 의한 한국적 리리시즘을 재현했다고 평가받는(신석정) ≪가람 시조집≫은 제재별로 5장으로 나뉘어져 있다. 명승지 기행, ‘난’과 같은 화초와 식물의 세계, 개인사적인 기억과 과거, 향토에 대한 회고와 죽음에 대한 사유, 시간의 순환과 사물 등의 소분류가 그것이다.
가람의 시에서 고도(古都)로 표상되는 전통의 유산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는 현재적인 감정의 파동 속에서 그 심미적 무게감을 획득하고 있다. 공적 기억에 투영된 사적 감정의 절창은 그것을 가능케 해 주는 주요 요인으로, 가람 시조가 보여 준 ‘시조의 현대화’의 한 전유 양상이며 보다 다변화된 시조의 스펙트럼을 예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살펴보았듯 전통의 현대화, 고전과 조선적인 것의 문학적 심미화는 ≪가람 시조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커다란 기획이다. 시조를 민족 동일성 담론에 갇힌 과거의 유산으로 남겨 두지 않고 현재에 재생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전통의 가능성을 심문하고 탐색했다는 데서 가람 시조의 문학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200자평
뛰어난 국문학자이자 교육자, 한글 운동가였던 가람 이병기. 그의 가장 큰 공로는 무엇보다도 시조의 현대 부흥의 기틀을 다진 것이다. 가람의 첫 번째 시조집으로, 고시조의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현대적인 시조 미학을 개척한 ≪가람 시조집≫을 만나 보자.
지은이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는 시조 시인이며 시조 부흥 운동을 주도한 시조 학자이자 국문학자였다.1891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했다. 유교적인 가풍 속에서 자라난 그는 고향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1906년 18세의 나이에 광산 김씨 집안의 수(洙)와 결혼했다. 1910년 전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한성사범학교를 입학한 이병기는 1912년 조선어 강습원에서 주시경 선생의 조선어 문법 강의를 듣기도 했다. 1913년 한성사범 졸업 후 남양, 전주제2, 여산공립보통학교의 훈도로서 교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문헌을 수집하고 주석 작업을 하던 이병기는 1921년 권덕규, 임덕재 등과 조선어연구회를 발기하고 간사직을 맡아 조직을 이끌었다. 1926년 영도사에서 시조회를 발기해 민족 문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1930년 이후 한글맞춤법통일단 제정위원과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피검되었다. 1943년 기소유예로 출감한 이병기는 귀향해 농업에 종사했다. 해방 후 다시 상경해 군정무 편수관으로 피임되어 활동 중 1946년 서울대 문리과대학교수로 부임했고, 다음 해 단국대학, 신문학원, 예술대학에서, 1948년 동국대, 국민대, 숙명여대 등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전주 명륜대학, 전북전시연합대학 교수를 지내다 1952년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56년 전북대학교에서 정년 퇴임을 맞이한 이후에도 중앙대, 서울대 등에서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57년엔 ≪우리말 큰사전≫이 간행되었으나 기념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뇌일혈이 일어나 이후 고향에서 요양했다. 학술원 공로상(1960), 전북대 명예문학박사학위(1961), 문화포상(1962) 등을 받았다. 10여 년을 병마와 싸우다 향년 78세인 1968년 고향 집 수우재(守愚齋)에서 숨을 거두었다.
엮은이
권채린은 1974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현대문학을 공부했고, 2010년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2005년 중앙일보 중앙신인문학상에 문학평론 부문으로 등단한 이후 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차례
一
溪谷
大聖庵
道峯
天磨山峽
朴淵瀑布
迦葉峯
萬瀑洞
叢石亭
海佛庵
月出山
二
蘭草 (一)
蘭草 (二)
蘭草 (三)
蘭草 (四)
梅花
水仙花
芭蕉
瑞香
梧桐꽃
함박꽃
葡萄
玉簪花
垂松
白松
三
젖
돌아가신 날
그리운 그날 (一)
그리운 그날 (二)
故土
시름
白墨
病席
그 뜻
고곰[瘧疾]
詩魔
四
周時經 先生의 묻엄
光陵
石窟庵
扶蘇山
松廣寺
梅窓 뜸
老石의 涅槃
鼎山을 보내며
曙海를 묻고
追悼 (一)
追悼 (二)
죽음
五
怪石
뜰
바람
별
구름
바다
落葉
밤[栗]
풀버레
소나기
비 (一)
비 (二)
비 (三)
우레
밤 (一)
밤 (二)
봄 (一)
봄 (二)
여름
저므는 가을
겨을밤
戱題 (一)
戱題 (二)
戱題 (三)
戱題 (四)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5쪽) <溪谷>
맑은 시내 따러 그늘 짙은 소나무 숲
높은 가지들은 비껴드는 볕을 받어
가는 닢 은바늘처럼 어지러이 반작인다
靑기아 두어 장을 法堂에 이어 두고
앞뒤 비인 뜰엔 새도 날어 아니 오고
홈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헝기고 또 헝기어 알알이 닦인 모래
고운 玉과 같이 갈리고 갈린 바위
그려도 더러일가 바 물이 씻어 흐른다
瀑布 소리 듣다 귀를 막어도 보다
돌을 베개 삼어 모래에 누어도 보고
한 손에 해를 가리고 푸른 虛空 바라본다
바위 바위 우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疲勞도 모르고 물을 밟어 오른다
얼마나 험하다 하리 오르면 오르는 이 길
물소리 끊어지고 힌 구름 일어나고
우럴어 보이든 봉오리 발아래로 놓인다